원당암

건립배경

고대에 속하는 유물은 대부분 원당암이라 불러지는 산내(山內) 속암(屬庵)에 있다. 물론 청량사라고 불려지는 가까운
거리의 사찰에도 중요한 석조유물이 상당수 전해지고 있지만 이보다는 원당암이 해인사와 보다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찰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이 절의 본래 이름이 봉시사(鳳棲寺)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신라 제 51대 진성여왕 대에 와서부터 각간(角干)
위홍(魏弘)의 원당(願堂)으로 되었기 때문에 원당암이라고 하는 별칭이 생겨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진성여왕과 각별한 관계에 있던 각간 위홍이 진성여왕 즉위2년(888)에 죽자, 그를 혜성대왕으로 추존하고
해인사를 혜성대왕 원 당으로 삼았던 데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진성여왕은 즉위 11년이 되는 897년 6월에 왕위마저 효공왕에게 물려주고 북궁(北宮) 해인사에 머물다가 12월에
세상을 떠나자 이웃한 황산(黃山)에 장사지냈다.

또한 진성여왕은 즉위 전에는 이미 북궁공주(北宮公主)라고 불려졌고, 또한 이때의 북궁은 신라 서울의 북쪽에 위치한
해인사를 가리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원당암에 있는 중요 유물들은 대체로 진성여왕 대에 와서 위홍을 위한 원당으로 지목되면서부터
이곳이 새롭게 각광을 받기 시작한 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제작은 888년에서부터 897년에
이르는 약 10년 사이의 기간으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 현존하는 중요 석조 유물로는 보물 제 516호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그리고 배례석을 비롯하여 보광전의 축대 등을 지목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보광전 전방에 나란히 배치되었는데 먼저 석탑은 특이한 청석탑이다.
이같은 청석탑은 국내에서 흔치 않은 이른바 점판암 계통의 석재를 이용한 공예적 소탑이 주종을 이룬다. 이 탑 역시
현재의 총 높이는 240cm에 지나지 않는다. 석탑의 구조는 지대석을 포함하여 3단의 화강석 기단 위에 대리석 탑신부를
마련하였고, 탑신의 네 모서리에는 독립된 석주를 배치하여 상부 옥개석을 받치고 있다.

초층 탑신부는 공간을 형성하여 내부에 사리 장엄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초층 탑신 상부에는 각층에 옥개석을 받쳤던
탑신석이 본래부터 없었는지 알 수 없으나 석탑의 체감률이 거의 없어 옥개석을 포개 넣은 듯하다. 곧 연화문 갑석 위에
모두 10매의 옥개석을 차례로 쌓아 두었고, 최상부에는 약간 불완전한 노반이 놓여 있다.

그리고 석등 역시 특이한 형태였다고 짐작된다. 곧 점판암을 이용한 희귀한 자료로서, 견고한 화강석 간주(竿柱)를 이용
하여 시각적으로 단조롭게 처리되었다. 불을 켜는 화사석은 결실되어 알 수 없으나 이 석등의 본래의 모습은 우아한
기품을 지녔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간석을 받치고 있는 6각 점판암의 하대석 역시 6면에 6엽의 복련을 아름답게
조각하였고, 시원하게 솟은 6각의 간석 위에는 연화문을 지닌 상대 받침석과 옥개석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비록 석등의 화사석이 없어져 현재는 전테 높이 180cm에 불과하지만 본래의 모습은 다른 곳에서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 그것은 점판암과 화강석을 혼용하여 높이 솟은 화강석 간석 위에 화사석을 배치한 혼용의 석재를
이용하였고, 또한 하대석 아래의 화강석 지대석은 이 석등을 지탱하기 위한 구조적 배려가 있었을 뿐 아니라
상하에 적용된 연화문 조각은 그 기품을 더해 주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청석탑 좌측에 있는 배례석은 보광전을 향하여 길이로 놓여 있다. 그것은 이 돌 위에서 예배하는 상징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법당을 향하여 길이로 놓여 있다고 생각된다. 건립 초기부터 이렇게 길이로 놓였는지는 알 수 없다.
배례석의 상부 판석 중앙에는 직경 22.5cm의 연화문을 두텁게 양각하였고, 다시 7.5cm의 연꽃 자방(子房)을
조각하였기 때문에 이 위에서 예배하기에는 매우 불편할 것으로 판단된다.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법당을 향하여
길게 놓이는 배례석도 있으므로 배례석의 용도는 그 위에서 예배하기보다는 향료와 촛대 등 의식 용구를 배치하였던 것
으로 짐작된다.

곧 배례석이 위치하는 곳이 석탑의 전면인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위에 의식 용구를 놓고 법요(法要)를 행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곧 큰 법요 때에는 그 전방 누각 건물에서 의식을 집행한 조선시대 이후의 사례로 보아 더욱 그러하다.
이 배례석의 전체 길이는 93cm에 폭 47cm, 그리고 높이 33cm의 한 돌로써 제작되었다. 배례석의 측면에는 안상을 조각
하였는데 이들은 전후에 각각 두 구 그리고 측면에 한 구를 새겨 그 아름다움을 더하였다. 따라서 그 크기로 미루어봐서도
배례석 위에서 직접 예배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끝으로 원당암의 주된 법당인 보광전의 축대를 주목해야겠다. 이 축대는 보광전 전면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특이한
작품으로서 다른 곳에서는 유례를 보기 어렵다. 그 높이는 약 40cm에 불과한 나지막하지만 정성이 스민 품격 있는 작품
이다. 상부에는 아름다운 몰딩과 연꽃모양을 지닌 머릿돌을 넓은 판석으로 배치했고, 그 아래 면석은 폭 약 51cm, 높이
약 27cm의 아름다운 안상을 조각하였다. 안상의 형태는 배례석의 형태와 동일하다. 이같이 보광전의 축대에까지 안상과
연화문을 새겨 존엄을 표현할 정도로 정성을 다한 것 역시 어쩌면 진성여왕의 여성적 섬세함이 작용한 결과라 하겠다.

이상 보광전의 석조물의 성격은 모두 위홍 각간을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하여 조성한 진성여왕의 배려가 도처에 엿보인다
하겠다. 따라서 이곳의 중요 석조물은 모두 신라 왕실의 배려 아래 조성되었음은 물론, 그 가운데에서도 청석탑을 비롯
하여 석등, 배례석 그리고 보광전의 축대에 이르기까지 그 조형 양식 등은 모두 자그마한 원당적 성격을 배경으로 하여
조성되었다고 하겠다. 동시에 그것은 혜성대왕 원당이 곧 진성여왕의 원찰(願刹)이었던 시대적 배경속에서 이룩될 수
있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