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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스님 법문

제목 해인지 인터뷰
작성일 2017-09-01 조회수 642 작성자 원당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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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총림 방장 벽산당 원각스님

 

오고감이 없고 시작과 끝이 없는 근원의 세계에서 계절이 따로

있을 리 없지만 해제를 맞은 산중은 봄과 함께 또 다른 풍경이

열리고 있었다.
해인총림 방장스님이 머무시는 퇴설당이다.
올해로 가야 산문에 드신지 50년이 되는 벽산당 원각대종사.
스님과의 한 나절은 문자로 선승의 반백년을 담아낼 수 있을까

하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따사로운 충만함이 더했다.
기꺼이 ‘지금 이 순간’을 내주신 스님께 출가50년의 소회를
여쭈었다.
“지난 시절 더 열심히 수행하고 공부하지 못했음이 조금

아쉽습니다. 그래도 좋은 도량에서 공부하고 수행할 수 있었음이
행운입니다.
앞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동안 열심히 정진해서 보람된 생을
살아야지요.”
모범답안이다.
대장경판 조성지로도 추정되는 저 멀리 하동에서 가야산으로의

입산은 1966년이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약수암에 공부하러 와 있던 중에 우리
노장님 상좌인 봉철(도림)스님이 한 번씩 건너오곤 했어요.
어느 날, 이제는 터 만 남은 가야산내 중봉암으로 가서 법문을
들었어요. 선과 악을 모두 다 내려놓고 본래 마음 바탕에서
살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어요. (와 닿고...

표현과 속이 후련하다는 말씀은 뒤에 또 나와서)
사실 내가 착함, 희생 같은 것에 강박이 있어서 대학에 합격하면

다른 누군가는 불합격인데 하는 지나침이 있을 즈음이었거든.
아, 그런데 둘 다 놓으라니 이런 딴 세계가 있구나 싶고 너무
좋았어요.
질문하고 답을 듣고 하다 보니 새벽예불시간이라.
내가 워낙 진지해서 그랬는지 예불모시고 공양 후에 <육조단경>

<보조법어집>등 책을 5권이나 줬어요.
약수암으로 내려와 그 책만 읽던 중에 도림스님이 출가를 권유하기에

내심 기뻤죠.
그날로 중봉암 가서 머리 깎고 행자생활을 시작했어요.”
하루 종일 부처님 언행이 담긴 경전을 읽으며 마음 한 구석부터 기쁨이

맑은 샘물처럼 고이기 시작했을 것 같다.
다음해  67년 정월 보름, 해제하고 중봉암으로 오신 은사
혜암스님과의 지중한 인연이 시작된다.
혜암스님이 누구신가?
경허, 용성, 인곡선사(편집장스님이 인곡스님을 넣자고...)로 이어져오는

한국불교의 선맥을 계승한 선사로 해인총림 방장, 조계종정을 지내신

어른 아니런가.
계행이 청정하고 성품이 대쪽 같으시니 말 잘못하면 쫓겨 간다는 언질이

있었음에도 처음 뵙는 자리에서 느낀 대로 얘기하고 제자 됨을 승낙

받았다. “우리 노장님이 말씀하시기를 ‘무슨 일이든
때가 있으니 놓치지 말고 젊을 때 공부해라.
스승 상좌 인연 짓고 중노릇 잘못하면 같이 지옥 떨어진다.’ 고 짚어주셨지.”

그 말씀 따라 입때껏 제방선원에서 정진하시다 2015년 해인총림 10대

방장으로 퇴설당에 드셨다.
홍안의 수줍고 내성적이던 청년이 가야산중의 어른으로 공부가 익은 지금,

돌아보면 노장님과 함께 살던 행자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이라

기억하신다.
“중봉암에 방이 하나뿐이라 스님은 아랫목에서 나는 윗목에서 새벽 입선

죽비치고 앉았지.
법문은 ‘내가 한 마디만 하지’ 로 시작하시면 수행에 필요한 습의에서부터

부처님 가르침까지 중단 없이 하셨어.
공양 지으러 갈 시간이라 말씀 드리면 그때서야 멈추셨지요.
초발심자경문을 글자풀이보다 뜻을 깊이 새긴다며 칭찬도 해 주시고...
그래서인지 하루는 이름을 지어 보라하셨어.
내 법명을,
그래 지은 것이 源覺(원각)이라.
근원을 한 번 깨치고 싶었거든.”
상좌에 대한 믿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일본 유학도 다녀오신 은사스님은 워낙에 깔끔한 성정이라 혼 난 적도

있었노라 상기하신다.
“물건정리는 말 할 것도 없고 걸레질도 요령 없이 하다가는 정신이 번쩍

나도록 야단을 맞았어.
수좌는 언제든 혼자 살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몸소

보이셨지요.
낮에는 나무하고 밭일하고 돌 깨고 약초 거름 주고 밤에는 아랫목 윗목에서

정진하고....어찌나 신심 나던지 힘든 줄도 모르고 하루하루 살았지.
노장님의 돌 깨고 장작 패는 요령은 늘 이치에 맞으셨고.“
장작의 단면을 보면 나이테가 성근 부분이 있고 촘촘한 쪽이 있다.
도끼로 그 성근 부분을 쳐야 나무가 쉽게 쪼개지고 아무리 힘을 써도

촘촘한 부분은 안 된다니 이것은 깨달음과도 닿아 있는 듯하다.
쉽고 편안하게 늘어져 사는 삶을 쳐내야 깨달음 또는 혁명이 오는 것

아닐까.
그렇게 중봉암에서 사제 간은 철저하고 오롯한 시간을 보냈다.
하안거 해제 후 자운스님께 계를 받고 해인사에서의 첫 철은 아주 특별했다.
“해인사 첫 총림에 입방하고 동안거를 시작했어요. 
그때 바로 초대방장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이 가야산을 호령했지요.”
아! 전설로 여겨지던 성철스님의 법문이 내려지는 그 순간을 함께 하셨다니.

“그 때 열기는 대단했어요. 공부대중이 많아서 퇴설당은 가행정진, 선열당은

보통정진, 조사전은 용맹정진을 했으니 온 도량이 선방이었지.
나는 선열당에서 정진했어요.
보통정진도 12시간을 짰을 때지. 자다 일어나보면 삼분의 일은 앉아 있으니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앉아.
그러면 또 성철스님께서 가끔 새벽에 고함지르며 방문을 걷어차고 경책하러

오시지.
졸다가도 정신이 들 수밖에.
나는 한 밤중에 대중이 깰까봐 살짝 일어나 법당을 돌면서 정진하기도 했었고.
점심공양 끝에 차 공양 시간이면  모든 대중이 모여 소참법문을 듣기도 했어요.
방장스님도 가끔 오시고 일타스님이 법문을 많이 하셨지요.”
그간 익히 들어온 대중이 공부 시켜준다는 말이 실감나는 지점이다.
해인총림의 가풍인 용맹정진은 이 때 부터 시작 된 것.
무섭도록 치열한 첫 동안거에 이어 해인총림에서 세 철을 내리 살고 있는데

공부 중에 전갈이 왔다.(뒤에 편지라는 표현이 한 번 더 나와서)해제하면

은사스님께 오라고.
“노장님께서 상 무주암 인근에 문수암 터를 닦고 계셨어요.
차도 안 들어오는 산골짜기에 불사를 하니 밥 해다 나르는 것은 기본이고

모래며 자재 운반도 힘들었지만 에피소드가 많았어요.
무허가 벌채로 노장님이 검찰에도 불려가고.”
그 와중에도 낮에는 불사, 밤에는 공부였다.
출가 후 은사스님과 지낸 나날은 절집에서 사는 내내 길잡이가 되었노라

회고하신다.
스승은 제자에게 어둔 밤길을 앞서가는 등불이라더니 과연 그렇구나 싶다.
“입대를 해서는 군대서도 선방처럼 살아보자 싶었지. 군모에다 ‘숙맥‘ 이라

써놓고 바보처럼  시비하지 않고 안으로 화두를 챙기며 공부하려고 노력했어요.
혼자 공부하다 의심이 생겨 노장님께 편지로 질문하면 그 좋은 필체로

자상하게 답장을 주셨지.”
편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는 사이,
공명이다.
선생은 있어도 스승이 없다는 이 시대,
엄중하면서도 봄바람 같은 그런 스승이 그립다.
공부를 하다보면 묘한 경계에도 이른다 들었기에 어느 때 그러했는지

조심스레 운을 뗐다.
노장님이 일러주신 -위에 초발심자경문이 나와서 이 부분에서는

안 넣었습니다.-
’平等性中(평등성중)에 無彼此(무피차)하고
大圓鏡上(대원경상)絶親疎(절친소)니라‘를 듣는 순간 계합이 되더라고.
평등한 성품 가운데 너와 내가 없고
큰 깨달음의 경지(본래 마음자리)에는 친소가 없다...는 가르침을

들으니 와 닿고 속이 후련했어.
스님께 말씀드렸더니 10년 공부한 수좌보다 낫다 그러셨지요.
수양매화 가지 끝에 봄물이 오르고 이끼 낀 옛 돌이 푸름을 찾는

퇴설당에서 나는 세상의 이분법을 떠난 중도의 가르침을 얻어 안았다.
총림의 방장소임은 한가로움이 떠난 자리다.
그래도 짬이 나면 도반을 만나는 기쁨이 소소하다 말씀하시는데.
“이제 도반도 몇 안 남았어.
그래도 범어사 수좌 인각스님하고 원융스님, 성곤스님하고

(달마사는 빼도 되지요^^)는 오랜 도반이지요.
젊을 때는 해제하면 만행을 같이 했는데 국내외 곳곳을 다녔어.
부처님 나라 인도에도 여러 번 갔고 미국 캐나다 일본등지에서는

교민불자들이 아주 좋아했지.
운전이며 가이드는 늘 내 차지라.
잠시 배워 둔 외국어가 요긴하게 쓰였고.”
그 시절 도반들의 인로왕보살이었듯 지금은 산중 어른으로 대중을

이끌고 계신 방장스님은 지난해 종단 최고 법계인 대종사 법계를 받으셨다.
’ 이 인연 공덕으로 불법이 더욱 증장되고 종단은 나날이 발전해 법의

수레바퀴가 쉼 없이 굴러 온 법계가 화장세계로 꾸며지기를‘ 발원한 스님.
 “해인사가 원융산림을 하고 선원, 율원, 강원 모두 다 같이 열심히

정진하는 수행풍토를 만들고 선 센터가 조성되면 불자들이 찾고 싶은

도량으로 가꾸어 나가야지요.”
저 깊은 곳에서 나온 말씀들은 지난날을 감싸기도 하고 내일 가야할

길을 밝혀주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은 어른스님의 세계에서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안다.
깨달음의 길, 부처의 길, 그것은 오래 되었지만 새로운 길이다.
변함없는 진리의 길이다.
한 사람을 알려면 그가 어디에 시간을 많이 쓰는지 보라고 했던가.
설명한다고 보여 지는 것은 아니라고.
꼬박 반세기를 불제자로 살아온 해인총림 방장 벽산 원각스님.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오늘 살아갈 길을 비춰주지 않을까.

스님은 북인도 여행 중에 세상에서 제일 높은 마을 키베르에서 만난 별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지금껏 만나본 별빛 가운데 가장 매혹적이었다고,

그 아름다운 은하수를 한 번 더 보고 싶어 새벽하늘을 다시 올려다보셨단다.


수행담을 적으며 생뚱맞게 별을 이야기 할 수 없었으나 무릎을 바싹 당겨

들은 만행 길 아름다운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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